지난 삶의 추억들
1. 초등학교 시절(51. 4.1---57.3.30) : 아버지와 마을 도로(사천시 용현초등학교)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때는 우리 나라가 참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해방둥이였으니까 초등학교 입학은 6.25 전쟁이 일어 난 다음 해였다.
우리 마을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긴 했지만 작은 산을 하나 넘어 다녀야 했다. 때문에 혼자서 다니기는 무척 무서웠고 힘들었다. 마을의 지형이 산이 둘러싸여 아담하고 한적한 전형적인 작은 농촌 마을이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 항상 함께 모여 갔으며, 수업이 끝나면 서로 기다렸다가 집으로 함께 오곤 했다. 좁고 꼬부랑 시골 산길은 그 당시 어린 생각으로 무척 멀기도 하려니와 다니기에 너무 힘든 길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마을 일을 맡아하면서(이장), 꼬부랑 산길을 넓혀 차도 다닐 수 있도록 마을길을 만드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일은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요즈음 같으면 예산도 풍부하고 일하는 장비도 발달하여 시골 마을의 도로를 만드는 일쯤은 그리 힘들지 않지만, 그 때엔 모든 것이 여의치 못했던 것 같다.
국가에서 도와주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오로지 마을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만 일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삽과 곡괭이로 흙을 파헤쳤고, 운반 도구라고는 힘든 지게에만 의지할 뿐이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돈 한 푼 받지 않고, 마을의 발전을 위한 일념으로 땀 흘리며 일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보다도 더 어려웠던 것은 도로에 들어가는 토지에 대한 보상 문제였다.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보상 없이 기꺼이 토지를 내어 놓았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의 땅이 들어가는 곳은 그러지 않았다.
특히 도로의 중간 부분에 해당하고 또한, 가장 긴 구간인 평송 마을의 강 씨 집안 문중 산이 큰 문제였다.
이곳을 지나지 않고는 도로가 뚫어지지 않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승낙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강 씨 문중에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승낙을 받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 씨 문중을 드나들며 애원했던 일이 어린 마음에도 너무 애처로웠던 기억이 새롭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초등학생인 우리들도 도로를 만드는 어른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려고 생각까지 하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우리들이 학교에 오가면서 조금씩 산길을 넓혀 나가자고 했다.
어린 생각에 이렇게 조금씩 넓혀 가면 언젠가는 넓은 도로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어이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때 우리들로서는 대단한 발상이었던 것이다.
승낙 받지 못한 곳을 이렇게 조금씩 넓혀나가면 그분들도 어쩔 수 없이 승낙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시작한 일이 며칠 지난 어느 날,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산직이가 우리들이 사용하고 숨겨 둔 도구들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 어린 마음에 우리는 얼마나 무서웠던지 학교에도 제대로 갈 수가 없었다.
그 후에도 어려웠던 일이 많았지만 결국 아버지께서는 도로를 개통하는 데 성공 했다.
한 번은 우리 집에 낯선 사람들이 몰려와서 가을걷이 해둔 벼를 몽땅 가져가는 일이 벌어졌다. 길에 들어가는 토지 값을 주지 않는다고 대신 벼라도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참담한 일이었다.
그런가하면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막걸리와 약간의 술안주를 집안에 준비해 두었다가 일하다가 지쳐 찾아오는 마을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때는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워서 술 한 잔 제대로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마련해 준 막걸리 한잔은 이런 마을 사람들에게 정말 큰 위안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 한다.
이곳에 도로가 나면 우리 마을 사람들이 편리한 것은 물론이려니와 산 지주들도 편리하긴 마찬가지인데도 약간의 금전 때문에 조금도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도로를 내는 것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로가 완성되고 나서는 우리가 학교에 다니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모른다. 좁은 산길을 다닐 때는 항상 무서움만 가득 찼는데, 넓은 도로가 나니 무서움은 없어지고 기쁨만 가득한 것 같았다.
도로가 생기고 난 후부터는 마을 사람들의 생활도 많이 바뀌기 시작 했다. 마을에는 우차(소가 끌고 다니는 수레)와 리어커가 등장하였고, 가끔 멋있는 자동차도 들어오곤 했다. 마을에 자동차가 나타나는 날이면 우리들은 자동차 뒤를 따라다니면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께서는 그 외에도, 물이 모자라 농사짓기가 어려웠던 웃담 마을의 천수답 논을 위해, 저수지를 만들어 마을의 가뭄 해소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용현면 의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부의장을 역임하면서 우리 면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불행하게도 오래 사지지도 못하고, 내가 군복무 중, 51세의 젊은 연세에 병환으로 이 세상을 하직 하시고 말았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진주에서 6 년간 하숙 생활을 했고, 사범학교 졸업과 동시에 교직 생활로 타향에서 보내다가 입대를 했다. 취학 전의 일은 잘 남아있지 않으므로, 아버지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초등학교 6 년 동안이 제일 긴 시간이고 많이 남아 있다. 그래서 더욱더 아버지가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지금도 가끔 고향에 가는 날, 아버지께서 애써 만드신 도로 위를 차를 타고 달리면서,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이젠 아스팔트로 포장 되었고, 시내버스까지 하루에 몇 번 씩 다니고 있으며, 하루 내내 많은 차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는 길로 변신 했다.
나는 미래를 훤히 꿰뚫어 보신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잠시 깊은 상념에 잠긴다.
2. 중학교 시절(57.4.3--60.3.24) : 작은 설날에 놀랐던 일(진주사범학교 병설 중학교)
나는 진주 사범학교 병설 중학교에 입학하여 진주에서 하숙생활로 중학 시절을 보냈다.
처음 하숙한 곳은 큰외삼촌 댁이었다. 당시 하숙비는 1 달에 쌀 20되와 약간의 반찬 비를 주었다. 쌀은 매달 주었으나 반찬 비는 매달 주지 않고 가끔 주었던 것으로 기억 한다. 친척 집이 아니면 꼬박 꼬박 내어야 했지만 친척이란 핑계로 그리 한 것 같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시골에 계셨지만 큰외삼촌께서 진주시청에 공무원으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작은 외숙모와 함께 진주에서 생활 하셨다.
당시 형님도 진주 고등학교에 다녔지만 형님은 하숙 대신 집에서 진주까지 통학을 했다. 둘이 모두 하숙을 하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형님은 통학을 했고 나는 어렸고 또한 병설 중학교가 통학하기에 너무 먼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하숙을 시켰던 것이었다.
나는 진주 농림고등학교에 다녔던 외사촌 형님, 그리고 초등학교 동기생인 외삼촌의 처조카인 S군과 함께 3 명이서 한 방에서 생활 했다.
S군은 진주중, 진주고를 졸업하고 중앙대를 나와 한국주택은행 본부에서 근무했으며, 창원지사로 파견 나와 있던 중에 사고로 일찍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맞이한 작은 설날 이었다. 내일이면 설날 이지만 집에도 가지 못하고 하숙집에서 보내야만 했다.
그 때는 음력설은 공휴일이 아니어서 쉬지 못했던 것이다. 법으로 설은 양력 설날 이었던 때문이다.
외숙모가 마련한 설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던지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얼마나 아팠던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이런 나를 본 외숙모는 놀라서 나를 업고 윤양병원으로 갔다. 그 때는 시내버스가 없었던 때라 외숙모 등에 업혀서 병원까지 갔는데 거리가 상당히 되었다. 그런데도 놀란 외숙모는 숨을 몰아쉬면서 그 먼 병원까지 나를 업고 갔다.
급히 진찰을 한 의사(김윤양 박사)는 맹장염이라고 했다. 빨리 수술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에 외숙모는 허락하지 못하고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연락하여야 한다면서 용현으로 내려 가셨다.
외숙모가 나가고 나서 혼자 침대에 누워 수술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 무섭고 떨렸다.
그냥 병원을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러지도 못하고 한참동안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움직일 수 있었다.
아프던 것이 점차 나아져가는 느낌 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병원 밖으로 나갔다. 병원 밖에서 있으니까 무서움도 가시었다. 갑자기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외숙모님이 부모님에게 연락하러 갔기 때문에 기다려야 했다.
1 시간 정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배도 점점 고팠다. 빨리 부모님이 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 때 버스가 병원 앞에서 멈춰 섰다. 병원 앞에는 버스가 서는 곳이 아니었는데 선 것이다.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데 버스 문이 열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형님, 외숙모와 함께 버스에서 내리셨다.
나는 부보님을 보고 얼마나 좋았던지 모른다. 나를 보신 어머님께서는 나를 부둥켜안고 그냥 우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제까지 아프던 것이 아프지 않았다. 언제 아팠냐 하는 것처럼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아프지 않다고 말했더니 부모님께서는 그제야 안심하시면서 병원으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부모님이 놀라는 것은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 형제자매는 다섯이다. 그런데 원래는 7 명이었는데 잘못되어 2 명의 누이가 아파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먼저 죽고 말았다. 유달리 자식들에 대한 마음이 지극하신 부모님이었는데 그런 일을 당하셨으니 오죽 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누이동생은 어머님께서 병환으로 진주병원에서 입원하여 치료하는 도중에 죽었는데, 당시 이 사실을 알려주지도 못하고 있다가 퇴원 후에 죽은 것을 알고는 얼마나 슬퍼하셨는지 모른다.
그런데다 내가 갑자기 아프다고 병원에 입원시켜두고, 외숙모님께서 작은 설날에 집으로 내려왔으니까 얼마나 놀랐을까!
다시 진찰실로 들어간 나는 침대에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아까는 많이 아프다고 했는데 이상하다고 한다.
오진이었던 것이다.
당시 윤양 병원은 맹장수술을 잘하는 병원이라고 소문이 나있었다. 그렇다고 오진으로 무조건 사람의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한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 때 외숙모의 판단이 없었더라면 나는 별수 없이 맹장 수술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맹장 수술을 한다고 해서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오진으로 수술을 한다는 것은 환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며, 환자 가족이 부담하는 수술비용은 또 어떤가!
요즈음 의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했다고 하지만 많은 환자들이 오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고 있다.
그 동안 아내도 의사의 오진으로 마찬가지 경험을 했다.
창원시에 있는 모 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가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졌다. 그래도 의사는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 하지도 않고 다른 병원에 가도 이 이상의 치료는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그리고는 똑 같은 시술을 되풀이하여 오히려 병을 더 악화시켜 놓고 말았다. 결국 서울에 가서야 제대로 진찰을 받을 수 있었고 그에 적합한 수술과 진료로 병세가 점차 호전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빨리 서울의 병원으로 갔더라면 더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자신이 없으면 정직하게 시인하고 물러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술일 것이다.
나는 그 후로 엉터리 맹장 진단한 그 병원장이 잊혀 지지 않는다.
남이 아무리 좋은 의사라고 칭찬해도 내 머리 속에는 엉터리 의사라는 생각뿐이다.
3. 사범학교 시절(60.4.7--63.2.28) : 도서관에서 시간가는 줄도 잊은 채 독서에 열중(진주사범학교)
사범학교 다닐 때 우연히 한국문학전집 중에서 이광수의 소설 사랑을 읽게 되었다. 주인공인 석순옥과 안빈의 사랑 이야기에 매료되어 수업이 끝나면 나는 반드시 도서실에 들러 책을 읽고 집으로 가는 버릇이 생겼다.
사범학교 도서실은 별도로 건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본관 1층 맨 서쪽에 있다. 일반 교실 2 개를 이용하여 도서실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도서실이라고 하지만 별다른 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앙에 6 인용 독서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고, 서가가 서쪽의 벽을 중심으로 5-6 개 정도 놓여, 도서를 진열하고 있는 정도다.
도서실을 담당하는 직원이 한 사람 배치되어 상시 근무를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일은 여학생들로 조직한 도서 위원들이 맡아서 했다.
내가 도서실에서 주로 읽은 책은 앞에서도 잠간 말했듯이, 한국 문학전집을 중심으로, 주로 소설이었다.
어찌나 재미있었던지 정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사랑을 비롯하여 유정, 무정, 흙, 마의태자, 이차돈의 사, 화분, 사반의 십자가, 실낙원의 별 등을 그냥 읽었다. 남정임과 최석의 사랑 이야기인 유정을 읽을 때는 뭐라고 애기해야 할 줄 모를 정도로 독서 에 빠져버리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내가 도서실에서 맨 늦게 나가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아까운 운동화 두 켤레를 잊어버리고 남아있는 슬리퍼를 끌면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그 후로 나는 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신주머니를 들고 학교에 갔으며 도서실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신주머니에 신발을 넣어 들어갔다.
지금도 그 때의 도서실에서 있었던 일 중에 가끔 떠오르는 것이 있다.
나는 거의 매일 도서실에 들렀는데 어느 사이에 내가 앉아 책 읽는 고정 자리까지 생겼고, 내가 도서대여 카드를 적어 도서위원에게 넘김과 동시에 원하는 책을 바로 건네주는 도서 위원이 있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업이 끝나면 도서실에 나타나니까 내가 어떤 책을 읽으려고 하는가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도서대여 카드를 쓰고 있는 동안에 그 책을 미리 서가에서 뽑아내온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해주던 그 도서위원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 당시 학제 개편으로 사범학교가 없어져 우리가 사범학교로서는 막내였다. 우리보다 아래 학년은 사범학교가 아닌, 병설고등학교라는 학교로 학생을 모집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희안 하게도 우리와 다른 학교의 학생들과 한 울타리 안에서 같은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으며, 함께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병설고등학교는 다시 진주 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이 바꿔졌으며, 다른 곳으로 건물을 신축하여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사범학교는 교육대학(2년제)으로 승격하여 우리가 졸업함과 동시에 신입생을 선발하여 현 사범학교 자리에서 개교하였다.
병설고등학교 학생들은 교사가 되려면 다시 교육대학으로 진학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도서위원 학생은 나보다 한 해 아래 학년의 병설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교육대학으로 진학하지 않고 일반 대학으로 진학한듯하다.
졸업하고 나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직에 들어왔다면 어디에선가 소식을 들을 법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 그 도서위원이었던 학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 미안한 마음이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고맙기는 했지만 그 말을 전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마음속으로만 고맙게 생각하고 열심히 책 읽는 데만 열중했던 것이다.
세월이 무지하게 지난 지금 만난다면 그 이야기를 하고 정말 고마웠다는 말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만날 수가 없다. 그래서 가끔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그 일이 머리에 떠오르곤 한다.
4. 교사 시절(63.2.28--87.8.31) : 숙직과 TV(산청군 생비량, 송계, 고성군 동광, 사천시 용현, 삼성, 사천, 비토, 용현, 가천, 구호초등학교)
학교에 처음으로 TV가 들어오던 때, 나는 사천시 삼성초등학교에서 재직하고 있었다.
군대 생활 3 년을 무사히 마치고 새로 복직한 학교가 삼성초등학교였다.
입대 전에 3 년 근무하고 군 복무 3 년이니까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6년째인 셈이다.
삼성초등학교가 위치한 곳은 당시 사천교육청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거리이다.그만큼 위치적으로 괜찮은 학교이다. 그보다도 고향 집에서도 얼마 되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집에서 생활하면서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군 복무 기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집에는 어머니와 동생들만 있었다(환우, 환재). 형님 식구들은 부산에서 살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어머님께서 내가 집에서 출퇴근을 하게 된 것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나도 이제까지 외지로 돌아다니다가 집에서 생활하게 되어 정말 기뻤다.
지금부터 약 40 년 전의 일이니 당시 교육환경은 정말 좋지 않았다.
그땐 시청각교육이란 말이 교육계를 온통 휩쓸다시피 했다. 그렇지만 여건이 좋은 학교에는 라디오, 카메라, 녹음기, 영사기, 슬라이드 투시물 환등기 등이 각각 1 개 정도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사천군 교육청에서 각 학교에 TV 1 대씩을 배부해 주었다.
일반 가정에서는 TV를 구경하기 힘들었던 때였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TV가 설치된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대단한 화제 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TV가 학교에 설치되고 나서부터는 숙직근무가 즐거웠다. 누구든 숙직을 하는 날은 TV 시청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KBS에서는 일일 연속극인 “여로”가 대단한 인기로 방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마을 사람들이 학교에 TV 시청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특히 “여로”가 방영되는 시간에는 더했다. 저녁밥을 먹고 “여로”를 시청하러 오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숙직 교사는 특별히 봉사해야만 했다. ‘여로“가 끝나면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내가 숙직하는 날이면 어른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모여 들었다. 학교가 있는 병둔 마을 아이들은 물론이려니와 멀리 화전 마을 아이들까지 왔다. 어른들은 ‘여로“가 끝나면 돌아갔지만 아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조금만 더 보고 가겠다고 졸라대는 아이들을 뿌리치지 못해서 그냥 둔다. 어떤 때는 피곤하여 내가 잠들어 버리면 아이들만 TV를 시청하기도 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시간이 많이 지난 것을 알고 아이들을 돌려보낸다. 하지만 밤이 너무 오래되어 아이들만 보낼 수가 없어 아이들과 함께 화전 마을까지 올라갔다 온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이러는 아이들이 밉지 않았다. 그래서 나무라지도 못했다. 1 달에 2-3 번 정도 다가오는 내 숙직 날을 용케도 알고, 그 날을 몹시도 기다리는 아이들이기 때문 이다. 아마 교무실에 청소하는 아이들이 교무실 게시판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다 같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인 듯 했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교사’
‘솔선수범하는 교사’
‘항상 연구하는 교사‘ 이 세 가지가 내가 바라는 교사상이다. 나는 언제나 이 세 가지를 실현하려고 노력 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우선은 ’어린이를 사랑하는 교사‘가 되는 일이다.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일은 교사로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음이다. 어쩌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성공하는 선생님, 좋은 선생님으로 오래 오래 아이들의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삼성 초등학교에서 나의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만나 결혼 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한국학 사서로 근무하고 있는 큰 아들 형배도 태어났다.
그만큼 삼성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 하나하나는 정말 내게 의미 있는 일들이고 소중한 것이다.
지금도 제자 중에서 가끔 만나고 사제 간의 정도 나눌 수 있는 일은, 삼성초등학교를 졸업한 제자들이 많다.
어느새 그들도 나처럼 인생을 살만큼 살아간 나이가 되어 있다.
퇴직한 지금도 나는 교사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으로, 옛 사진첩이나 졸업 앨범을 뒤적이며 아이들이 보내왔던 해 묵은 편지를 스크랩에서 꺼내 읽어 보는 습관이 있다.
5. 교감 시절(87.9.1--93.8.31) : 김태엽 교장님의 열정(합천군 문림, 사천시 서부, 서포, 건흥초등학교)
사천시 곤양면 서부초등학교는 내가 교감으로 두 번째 근무한 학교이다.
사천시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곳이다. 하동군 진교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나는 이 학교에서 교감 생활의 중간 기간을 보내면서 존경하는 김태엽 교장 선생님과 함께 근무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김태엽 교장선생님은 고향이 바로 곤양면이시다. 그러니까 고향에서 근무하고 있는 셈이다.
교장 선생님은 뒷날 곤양초등학교로 전출하여 정년퇴직을 맞았다.
내가 김태엽 교장 선생님을 존경할 수 있었던 것은 함께 근무한 2 년 동안에 보여주신 탁월한 학교경영과 멈출 줄 모르는 교육적 정열 때문이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 안에 있는 사택에서 사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24 시간을 어린이와 학교를 위해 생활하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를 비롯한 선생님들은 진주에서 통근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한다.
그러나 교장선생님께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교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교장 선생님의 교육애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아이들의 국악창 지도를 직접 해 주셨던 일이다.
당시 서부 초등학교 학생 수는 전교생(유치원아 포함)이 75 명 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전교생을 대상으로 우리의 전통 노래인 국악창을 가르쳤다. 지도 시간은 아침 활동 시간과 점심 활동 시간을 이용 했다.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지도 하시는지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고 생각 한다. 정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연세이면서도 교장 선생님의 학생 지도 열정은 어느 젊은 교사들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보통 한 곡을 선정 하면 이 곡을 완성하기 까지, 적게는 2 주간, 많게는 1 달이나 걸렸다. 또한 전교생이 모인 자리인 만큼 특별한 지도 기술이 없으면 지도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도 어렵고 힘든 국악창 지도이니 오죽할 것인가.
그러나 교장 선생님의 지도 기술은 참으로 대단 했다. 전교생이 모두 교장 선생님의 지도에 흠뻑 빠지고 만다.
유치원아와 6학년생의 차이는 6년이나 된다. 개별화 지도를 부르짖고 있는 교육현장이고 보면 이는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이 지도에 잘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교장 선생님의 학습지도 기술은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
그 동안 교장 선생님이 지도하신 곡은 농부가 외 7 곡이나 된다.(꽃타령, 새타령, 뱃노래, 아리랑, 도라지, 풍년가, 노들강변)
전교생이 예쁜 한복 참으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름답다.
이런 본교 어린이들의 국악창 실력은 삼천포 교육청 관내 여러 학교에 알려졌다. 따라서 삼천포 교육청에서 주최한 초등학생 학예 발표회에 특별 초청으로 참가하는 영광까지 얻었다.
버스 2 대에 전교생, 학부형 교사들이 나눠 타고 삼천포 학생 실내 체육관에서 열렸던 발표회에 참가하여 받았던 박수갈채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사회를 맡았던 선생님의 멘트는 서부초등학교 어린이들과 학부형 교사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는 사실도 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교장 선생님은 이런 모든 공을 우리 선생님들에게 돌리는 아량을 베풀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로 서부초등학교는 국악창 시범학교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회의 때나, 다른 모임에서 선생님들을 만나면 서부초등학교 국악창 이야기가 단골 화제 거리로 나온다.
시범학교 보고회, 졸업식, 입학식에서도 어린이들의 국악창은 교정에 울려 퍼졌다.
당시 경남에서 국악창으로 명성을 날렸던 조순자님께서 직접 본교를 방문하셔서 우리 어린이들의 노래를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현장에서 몇 가지 지도도 하여 주었다. 명창으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은 아이들의 기쁨은 또한 얼마나 컸을까!
교장 선생님의 이런 열정은 우리 선생님들에게 교직에 대한 사명감과 교직관 확립에 큰 힘이 되었다.
선생님들은 학습지도를 비롯한 학교경영에 모두 최선을 다하여 시범학교 보고회 준비나 학력 향상에 힘을 모으는 것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나도 훗날 학교장으로서 학교경영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좋은 가르침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 딸 영민이가 과학고에 입학(진주에서 유일하게 한 명 입학 함)
* 형배가 영문 편지 쓰기 전국 대회 입상, 외국어 경시대회 프랑스어 부분 입상 : 시상식 후에 청와대 방문 대통령 내외분(노태우, 김옥순)이 참석하는 리셉션 참석, 정원식 교육 부 장관 만남)
* 아들 형배가 서울대에 입학(서울대 인문대학 수석 합격)
* 딸 영민이가 서울대 입학(사범대학 화학 교육과)
6. 연구사 시절(95.3.1--99.8.31) : 1 : 1의 평가 감독(경남교원연수원)
초등 1 정 자격과정 연수가 한참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1 교시가 거의 끝나갈 무렵, 급한 연락이 왔다. 연수생 1 명이 연수 도중에 갑자기 쓸어졌다는 내용이다.
나는 3층에 있는 종합 강의실로 급히 올라갔다.
연수생들이 몇 명 강의실 중간쯤에 몰려 있고, 그 가운데서 한 연수생이 다른 연수생을 부등켜 앉고 있었다. 앉긴 연수생은 눈을 감은 채 얼굴이 창백했다.
급히 달려 온 간호사가 쓸어져 있는 연수생을 안으며 양호실로 데려 가자고 했다. 그 때 한 연수생이 전화로 119 구급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그제야 119 생각이 떠올랐다. 급할수록 침착해야 하는 데 너무 당황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간호사도 그게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빨리 1층으로 업고 가자고 했다.
건장한 남자 연수생이 업고 1층으로 내려가니 벌써 119 구급차도 앵앵거리며 도착 했다.
구급차에서 내린 119 대원들이 급히 들것으로 연수생을 싣고 앰뷸런스로 옮겼다. 그 날 2교시는 객관식 1 차 평가를 하는 시간이어서 간호사만 함께 앰뷸런스에 태워 보냈다. 평가 관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 강당에서 평가지를 연수생에게 배부하고 평가를 막 시작하려는 데 갑자기 앵앵하는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상하게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조금 전에 실려 갔던 그 연수생이 앰뷸런스에서 내리는 것이 아닌가.
병원으로 실려 가던 연수생이 정신을 차리더니 지금 빨리 가서 평가에 참여해야 한다면서 병원으로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아왔다는 간호사의 말이었다.
나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그래도 다른 연수생들과 강당에서 함께 평가를 치르게 하게하는 것은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우선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양호실 침대에 눕혀 놓고 원장님께 이 사실을 보고 하였다. 그리고는 양호실에서 나와 1 : 1의 감독으로 평가를 치르도록 허락을 받았다.
나는 평가 문항지외 답안지(OMR 카드)를 들고 양호실로 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연수생에게 평가지침을 설명하고 평가를 실시하였다. 누워서 문항을 읽고 답을 말하면 나는 그 답을 OMR카드에 그대로 체크해 주었다.
이런 평가는 우리 연수원이 개원한 이래 아마 처음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내 머리 속에서 잊혀 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일로 되었다.
평가 결과 성적이 나쁘거나 평가에 참여하지 못하면 0점 처리되는 연수원의 평가 규정을 잘 알고 있던 연수생이 모처럼 얻은 1 정 자격 연수에서 탈락하는 불명예를 당하기 싫었던 것이었다.
이렇도록 우리 선생님들은 교직에 대한 열정과 책무감으로 뭉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다.
비록 그날은 하루 종일 강의실에서 직접 강의를 듣지 못하고, 양호실에서 간접으로 동료 교사의 전달에 의한 강의로 대신 했지만 결시 처리는 하지 않았다.
그 결과 무사히 연수를 끝내고 1정 자격을 취득하게 되었다. 그러한 열정과 책무감으로 교직에 임한다면, 분명 그 선생님이 담임한 반의 어린이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선생님이라고 호칭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연수가 끝나는 날 사무실에 찾아와서 연수 잘 마치고 간다는 인사를 하고 떠났던 그 연수생이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 형배 서울대 후반기 우등 졸업 및 대학원 입학
* 영민 서울대 졸업
7. 연구관(장학관) 시절(99.9.1--2003.8.31) : 중 3의 학력 평가(경남교육과학 연구원, 경남교육연수원, 경남함양교육청)
내가 교육연구관으로 승진하여 자리를 옮긴 1999년 9월 1일은 우리 교육계에 너무도 큰 변혁들이 소용돌이 쳤던 해였다.
변화가 좋은 방향으로 되면 환영할 일이지만, 이 때 교육계에 불어 닥친 변혁은 우리 교육계를 암울하게 만든 것들이 많았다.
교원 정년 단축에 따른 교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버린 것은 둘째 치더라도 억망이 된 교육 내부의 혼란들은 앞으로 다가올 힘든 교직생활을 예고했다.
혹자는 이때의 이일을 두고 무면허 운전자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격이라고 혹평까지 서슴지 않았다. 무면허 운전자가 거리를 활보하는 곳이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이처럼 우리 교육계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갑작스런 교원 정년 단축은 한꺼번에 많은 교원들이 교직을 떠나게 되어, 그에 따른 인사가 무척 혼란스러웠다.
많은 승진, 많은 자리바꿈으로 현장에서는 업무인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또 다른 업무를 추진해야만 했다.
내가 새로 부임한 경남교육과학연구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구관 4 명이 모두 바뀐 것은 물론이려니와 연구사들도 한꺼번에 많이 이동되었다. 거의가 이번에 새로 전문직으로 전직한 연구사들로 채워졌다.
나는 교육연구부장으로 보임되었는데 우리 부에도 4 명 중 3 명의 연구사가 새로 부임했다. 이러다보니 무슨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 가도 정하기 혼란스러웠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당장 급한 일이 중 3학년의 학력 평가 실시였다. 9월 중에 실시하는 것으로 계획이 잡혀 있다.
담당자의 의견을 들으니 모든 준비는 완료되어 있다고 했다. 계획에 의하면 우리 연구원에서는 평가 문항지만 제공하면 그 나머지는 지역 교육청과 일선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평가 문항은 지난여름 방학 동안에 일선 교사들로 구성된 평가 위원들이 이미 출제하여 부장 캐비닛에 보관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담당 연구사의 말대로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평가는 출제에서부터 결과처리 까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지 않고는 평가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
엄격한 보안 유지, 정확한 결과 처리, 명확한 해석 등이 생명인데 지금 각 지역 교육청의 상황으로는 새로 부임한 담당자들이 이 일을 탈 없이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획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었다.
나와 원장은 몇 번 궁리한 끝에 최종적으로 계획을 수정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문항 출제, 문항 인쇄, 문항 배부, 결과처리 까지 연구원에서 한다는 것으로 변경 했다. 그리고 시행 일자도 조정하여 9월에서 10월 중순으로 정했다. 조금의 실수만 있어도 그 최종 책임은 우리 연구원에서 질 수 밖에 없으므로 사전에 어떤 실수라도 차단하자는 취지였다.
평가 문항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활용하기로 하고 인쇄 배부를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전국을 대상으로 관보에 입찰 공고를 내었더니 중ㅇ에서 1 곳, 지방에서 1 곳이 입찰에 응했다.
중앙은 서울에 있는 J 유명 평가원이었고, 지방은 대구에 있는 D 유명 평가원이었다.
그런 데 입찰 결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J 평가원이 단돈 1000원으로 입찰에 성공한 것이다. 나는 걱정스러웠다. 이러고도 일이 제대로 잘 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무부장은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 계약대로 틀림없이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앞으로 사업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일에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걱정이 앞서 평가 문항 원안을 보낼 때 우리 연구원 담당 연구사를 직접
출장 보내,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도록 했다.
J 평가원에서는 내가 걱정 했던 것과는 달리 모든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 주었다. 특히 평가 원안을 인쇄에 부치기 전에, 자체 조직되어 있는 전문 평가원들을 동원하여 우리가 보낸 원안을 다시 검토하는 치밀함까지 보여 주었다.
그 결과 가정과와 사회과에 문항이 잘못 출제된 것을 찾아내었다는 출장 보낸 담당 연구사의 연락이 왔다. 나는 급히 출제 담당자를 연구원으로 불러 그 문항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는데, 잘못된 것을 시인 했다. 즉시 그 문항을 바로 잡아 인쇄에 들어가게 했다.
나는 그렇도록 치밀하게 단돈 1천원에 낙찰 한 사업을 잘해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고맙기만 했다. 만약 잘못된 문항을 인쇄배부 했더라면 연구원의 공신력은 그야말로 곤두박질치고 말 일이 아니었는가. 참으로 아찔했던 일이었다.
인쇄 완료된 평가문항을 학교별, 학급별로 밀봉하여 연구원으로 실어온 그날 저녁에 나는 숙직하는 연구사와 함께 숙직실에서 밤을 지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다음 날 일선 담당 장학사들에게 문항을 배부하고 나서, 평가가 완료될 때까지 잠시도 마음 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평가는 아무런 탈 없이 끝났으나 그 후에 수거한 OMR카드로 결과 처리를 하는 데만도 무려 1 개월이란 기간이 걸렸다.
평가 결과에 대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도저히 이 결과를 모든 학교에 공개할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지역별, 학교별, 그리고 개인별 성적 차이가 너무 컸던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이번 평가 결과는 당해 학교분만, 학교에 공개(학급별, 개인별)하는 것으로 내렸다.
여러 학교에서 학교장들이 평가 결과가 궁금해서 물어왔지만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해서 무척 안타까웠다.
처음 당한 업무치고는 너무 힘든 일이었기에, 그 다음 바로 닥쳐왔던 교육부 위탁 교육과정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보고회를 마친 일이 무척 아쉽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 아들 형배 결혼---며느리는 같은 학교, 같은 과를 졸업한 박성민
* 아들 형배 가족과 함께 미국 예일 대학에 유학 감
* 손자 호진이 출생--미국에서
8. 교장 시절(2003.9.1--2007.2.28) : 다이빙부 창단(합천군 유전, 창원시 봉림초등학교)
창원 봉림 초등학교는 나의 마지막 근무지였다.
나는 이곳에 발령을 받으면서 정년을 맞을 학교가 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 했다.그러니만큼 나의 마지막 정열을 쏟아 학생들을 지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3년 6개월 동안 봉림 초등학교 근무 기간 중에는 여러 가지 잊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다이빙부 창단과 활동은 나에게 또 다른 경험을 준 일이었다.
그 동안 나는 교직 생활을 하면서 체육과는 거리가 먼 교육활동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봉림 초등학교에서 다이빙부를 창단한 일은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초등학교에서 다이빙부라는 것은 매우 생소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경상남도에서는 초, 중, 고, 대학 어느 곳에도 다이빙부는 없고, 또한 다이빙을 하는 것도 볼 수 없는 일이다.
분만 아니라 학교에는 다잉빙장은 말할 것도 없고 수영장조차 없는 형편인데 다이빙부를 창단하는 일은 상상 하기 힘든 일이다.
본교에서 다이빙부를 창단하기까지는 어려움도 있었다. 학교 규모로 봐서는 운동부 하나는 운영해야 걸맞다. 그런데 지금까지 운동부 운영이 제대로 되지못하고 있었다. 고작 여자 핸드볼 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시원찮았다. 핸드볼도 실내 운동인데 체육관이 없는 학교에서 핸드볼은 불가하다. 그래서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선수들을 볼 때 참 미안했다. 이런 저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다이빙 부의 창단이었다.
한마디로 블류오션 전략이다. 다른 어떤 운동도 치열한 경쟁 없이는 경남 대표로 선발되기 어렵다. 설사 경남 대표로 선발되어 전국 대회에 출전하더라도 높은 성적으로 입상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런데 다이빙은 창단과 동시에 본교의 대표 선수가 바로 경남의 대표 선수로 선발되는 것이다. 경남의 대표로 등록되면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모든 훈련 경비와 코지를 지원해 준다.
블류오션 전략이 이처럼 성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봉림 초등 다이빙부는 창단과 동시에 각종 전국 대회에서 입상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제주도에서 열렸던 동이일보 배 전국 초, 중, 고 학생 수영 대회에서 동메달 2 개를 획득했으며, 아산 배 대회에서도 메달을 획득했고, 그해 청주에서 열렸던 전국 소년 체육대회에 처녀 출전하여 동메달 2 개를 획득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하여 봉림초등 다이빙부는 단연 전국적인 다이빙 부로 급부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는, 소년 체육대회에서 입상한 선수들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일에 참여하여 입상 선수들에게 메달을 걸어주며 격려했다.
이듬해에도 각종 전국 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메달 획득을 하였으며, 창단 2차년도, 울산에서 열린 전국 소년 체육 대회에서도 금메달 1 개와 동메달 1 개를 획득하였다. 특히 금메달은 이번 소년 체육 대회에서, 맨 처음 금메달을 우리 경남 선수에게 안겨 주었던 쾌거였다. 이번 대회에서도 나는 입상 선수들에게 메달을 수여하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전국 다이빙 협회에서 우리 봉림 초등의 다이빙 선수들에게 그만큼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다보니 학교 교문에는 거의 일 년 동안 내내 계속하여 다이빙부 어린이들의 대회 입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이를 쳐다보는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봉림 초등학교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해에 이어 교육감과 도지사로부터 체육 발전에 공헌 했다는 감사패까지 받았다.
학창 시절부터 체육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던 내가 체육 유공자로 이런 감사패까지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는 학교장인 내가 노력한 결과는 결코 아니다. 우선 그 동안 코치로 영입되어 처음 창단한 팀을 열심히 지도해 주신, 전 국가 여자 다이빙대표 선수였던 윤은숙 코치의 탁월한 지도력과, 교 다이빙 지도 교사인 박시동, 박수영 두 분 선생님의 열정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대로 된 시설이 없어, 먼 곳까지 전지훈련을 다니면서 고생한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내가 정년퇴직으로 학교를 떠난 후에 어찌된 일인지 봉림 초등 다이빙부의 활동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렵게 창단한 팀인데 이젠 조금만 관심을 쏟으면 훌륭한 팀으로 키울 수 있을 건데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한 번 봉림 초등 다이빙부의 활약상을 적은 플래카드가 교문에 걸려, 어린이들과 오가는 학부모들에게 자긍심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딸 영민이의 결혼
* 아내의 그림, 작품 개인전(성산 아트 홀)
* 손녀 예진이 출생(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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